클래스 E1 : 조선 왕을 만나는 시간 신병주

클래스 e1 : 조선 왕을 만나는 시간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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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광업은 시대에 따라 주력 광물이 달랐고, 경영형태도 차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대개 농민의 부역 노동에 의존하는 관영 광산 위주였으나, 차츰 임금노동자를 투입하여 채굴하는 사영 광산이 많아지게 되었다. 1888년에는 해산회사(海産會社)라는 어업 관련 기업이 처음 조선의 자본으로 설립되었다.


이 서원은 뒤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건의로 1550년(명종 5)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신윤복은 김홍도처럼 일반서민들의 생활상을 파헤치기보다는 생활의 여유를 가지고 인생의 즐거움과 남녀간의 ‘애정’를 추구하는 한량과 기녀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주력하였다. 「밀희투전」이나 「성하직리」 등 그의 작품들에서 김흥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김득실 역시 뛰어난 기량을 가졌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소설에서 애정을 다루었던 것은 「 금오신화」, 「 주생전」, 「 운영전」과 같은 조선 초기 내지 중기의 작품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 유행하였던 애정소설은 젊은 두 남녀가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맺어지기까지 겪어야 하였던 시련과 그 극복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 춘향전」이 있고 이 밖에도 「 숙향전」, 「 숙영낭자전」, 「 윤지경전」, 「 백학선전」 등이 있다.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겨나고, 시전(市廛)이 형성되었다. 청계천은 북촌과 남촌을 구분하는 경계의 공간이기도 하였으며, 청계천 주변은 역관, 의관, 시전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즉 중촌(中村)이라고 하였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아버지 영조, 아들 명종을 끊임없이 나무라며 심리적으로 학대한 문정왕후, 아내나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각했던 고종… 역사가 긴 만큼, 조선 왕실에 나타난 ‘문제적 인물’도 가지각색이었다.


황토고원의 서쪽 란조우 근처에 두께가 200m가 넘는 뢰스 침적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신장지방과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 경계에 해당한다. 그 외 중앙아시아, 남부 이스라엘, 서부 아르헨티나, 미국의 대평원 등지에서도 광범위한 뢰스지대가 분포하고 있다. 뢰스는 신생대 제4기 경(약 18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바람에 의한 토양의 이동과 퇴적의 역사는 매우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일본 정부는 청과의 충돌을 회피하려고 발을 빼고, 조선 내부의 지지도 얻지 못해 권력을 장악한 지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명성황후는 점차 여흥 민씨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파 세력을 형성하여, 1895년 시해될 때까지 조선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880년 이후 명성황후의 친족들이 중앙정계의 요직을 거의 다 차지하여 매관매직과 조세 증수 따위의 전횡이 심하여 민심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7세기 후반 청의 중국 지배가 확고해지자, 사림세력 각자의 내심이 어떻든 겉으로는 공통의 목표이던 북벌론이 힘을 잃어, 붕당 사이에 대립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포천계곡은 가야산국립공원을 타고 내려오는 줄기로 전장은 약 7㎞에 달한다. 포천계곡은 바위에 청색 무늬가 있어 마치 베(布)를 널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얻은 이름으로 가장 아름다운 포인트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원조(1792~1871)가 만년을 보낸 만귀정(晩歸亭) 근처다. 만귀정 옆에는 만귀폭포가 있는데 웬만한 가뭄에도 수량이 줄지 않고 힘차게 흐르고 있다. 보람상조를 위시해 상조업계의 시설 및 서비스 프리미엄화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 건국 직후 선택한 것은 관이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각염법(榷鹽法)이라 부르는 일종의 소금 전매제였다. 관이 염장 설치와 생산을 관할하고 내륙 고을에는 염창(鹽倉)을 설치하여 유통까지 관할하였다. 태조 때에는 쌀과 포(布), 태종 때에는 잡곡도 소금과 교환할 수 있게 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개인이 소금을 굽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상인의 소금 유통 판매를 엄격하게 배제한 결과, 소금을 얻기 어려운 곳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영토의 3면이 바다이고 섬도 많은 까닭에 어업이 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시대의 어업은 면화 재배의 확산에 따라 면망을 만들어 쓰게 되고, 제주도 어민과 해녀가 활동하면서 전보다 먼바다에도 나가 활동하고 물질을 하는 지역도 넓어지는 등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경남 사천시 정동면 우주항공 테마공원 인근에 100평 규모의 우주미술관이 2020년 휴관하였다가 내부를 단장하고 3월 다시 재개관하였다.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미술품을 기반으로 1982년 문을 연 호암미술관이 1년여간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지난 5월 재개관했다.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을 시작으로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기획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국역의 경우에도 건국 초부터 군역(軍役) 등의 역이 있는 자에게 호 단위로 의무를 지웠고, 군역을 비롯하여 천역에 이르기까지 조호(助戶, 봉족)를 공정(公定)하였다. 공법으로의 전세 개혁은 경차관의 농간 등 답험손실법의 운영상의 결함을 시정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즉, 조선 초기의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어 농업생산력이 증가, 이로써 정액수세법이 제정된 것이다.


한편, 조선에는 지역민들을 치료하고 약재를 처방한 유의(유학자이면서 의학 지식에 밝은 사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석간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영주에서 지역민을 치료하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정조는 재난 상황에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펼쳤고, 이와 더불어 정약용은 근본적으로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의서 제작, 한글 번역, 약재 제공 등의 방안을 제시했고, 재난 대책과 예방 대책 연구를 지원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 뒤에 숨어 있는 이러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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